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시모토 유키오 (문단 편집) == 은퇴 이후, 그리고 평가 == ||[[파일:external/img.47news.jp/PN2011112501001177.-.-.CI0003.jpg|width=100%]]|| || 만년의 니시모토 || 1982년부터 2003년까지 [[간사이TV]] 해설가로 활동하였고, 1985년 시즌 전 [[다이요 훼일즈]]와 [[한신 타이거스]]의 감독 취임 요청을 받았지만 고령과 건강 문제를 이유로 거부했다. 이 때 니시모토는 한신 구단 측에 "나 대신 예전에 그쪽 팀 감독이었던 [[요시다 요시오]]는 어떻소?" 라고 추천하여 한신은 요시다를 감독으로 재영입 했는데, 공교롭게도 요시다 감독은 그 해 구단 사상 최초로 [[1985년 일본시리즈|일본시리즈]] 제패를 달성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1996년 시즌 후에도 한신은 한번 더 니시모토를 감독 후보로 검토했지만 ~~[[노인 학대|일흔 여섯 노인네를 현장에서 굴리겠다고???]]~~ 또 다시 거절하면서 니시모토의 현장 복귀는 무위에 그쳤으며 이 때에도 니시모토 대신 한신 감독에 취임한 인물은 바로 [[요시다 요시오]]였다. 2003년 9월, 니시모토는 80살을 넘긴 고령으로 인하여 해설가 직에서 물러난 후[* 해설가 은퇴 경기는 한신이 1985년 이후 [[호시노 센이치]]의 지휘 아래 18년 만에 [[센트럴 리그]] 우승을 확정지은 2003년 9월 15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전이였다. 여담으로 18년 전 한신이 처음으로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하기 전 21년만의 센트럴리그 우승을 확정지은 1985년 10월 15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즈]] 전에서도 니시모토가 해설을 맡았다.] 가끔 스포츠 신문에 기고하는 것 이외엔 [[효고현]] 다카라즈카 시에서 바깥 출입을 삼가며 은거해 오던 중, 2011년 11월 25일 자택에서 노환으로 인한 [[심부전]]으로 [[별세]]하였다. 향년 91세. 그의 장례식은 11월 29일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자리에 세워진 쇼핑몰 '''한큐 니시노미야 가든즈''' 부근 장례식장에서 거행되었고, 조사(弔辞)는 니시모토의 긴테쓰 감독 시절 애제자이던 [[나시다 마사타카]]가 낭독했다. [[파일:external/img.47news.jp/PN2011112801001770.-.-.CI0003.jpg]] 감독 시절 선수 육성에는 상당히 뛰어났고, 하위팀을 상위팀으로 끌어올리는 데 일가견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생전 은둔생활 중에도 야구계 원로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신 타이거즈]] 감독을 지낸 원로 야구인 [[요시다 요시오]]는 "니시모토는 명장이자 명 코치였다"라고 극찬한 바 있으며, 1979년 만년 하위구단이던 킨테츠를 리그 우승으로 이끌어 파리그 활성화에 공헌한 점을 인정받아 준우승 감독임에도 일본 야구 최고의 상인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수상했다.[* 보통 그 해 일본시리즈를 제패한 팀의 감독에게 주는 상이다. 일본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했음에도 쇼리키상을 수상한 감독은 이 사례와 한신의 암흑기를 끝내고 18년만의 세리그 우승을 이끈 2003년 [[호시노 센이치]]밖에 없다.][* 감독이 아닌, 그 해 일본시리즈 MVP나 리그 MVP를 수상한 선수가 수상하는 경우도 있다.] 명감독을 키워낸 명감독으로도 유명했는데, 한큐 감독 재임 중에 마이니치 시절 애제자 [[야마우치 카즈히로]]의 추천만 믿고 수석 코치로 영입한 [[우에다 토시하루]]는 훗날 니시모토의 후임 감독으로 한큐를 퍼시픽 리그 4연패, 일본 시리즈 3연패로 이끄는 대업을 달성했고, 긴테쓰 감독 시절 전임 [[미하라 오사무]]의 오른팔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비 겸 주루코치로 중용한 [[오기 아키라]]는 훗날 긴테쓰, 오릭스 감독으로 퍼시픽 리그 우승 3회, 일본 시리즈 우승 1회의 실적을 남겼다. 그것도 [[나가시마]]가 이끄는 요미우리를 제물삼아.[* 참고로 나가시마는 1기 감독 재임중에 '''[[우에다 토시하루]]가 이끌던 한큐에게 2번이나 일본시리즈에서 깨진 경력이 있다.'''] 또 긴테쓰 감독 때 제자로 키운 [[나시다 마사타카]]도 긴테쓰의 마지막 감독,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닛폰햄]] 감독으로 리그 우승을 달성하기도 했다. ~~근데 문제는 이분도 니시모토와 만만치 않은 콩라인(...)~~ 한편으로 일본 야구계에선 대표적인 철권통치의 아이콘 이었으며, 종종 선수를 구타하여 구설수에 오른 적도 있었다. 1975년 긴테쓰 감독 시절 [[한큐 브레이브스]] 와의 경기 막판 긴테쓰에 강한 면모를 보이던 야마구치 타카시[* [[장훈(야구선수)|장훈]]에 일본프로야구 최초이자 유일한 3,000안타를 내준 우완투수다. 은퇴 후 한신 타이거스 투수코치로 재직하면서 [[후지카와 큐지]]를 리그 최정상의 불펜투수로 키워내었다.]가 구원 투수로 등판하자 타자들을 불러 모아서는 "절대로 초구는 치지 말라. 만약 초구가 볼이면 2구도 휘두르지 말라"고 지시했는데, 후속 타자인 하타 코이치가 무심결에 초구를 헛스윙하고 3루 땅볼로 물러나는 바람에 열받은 니시모토 감독이 덕아웃에 돌아온 하타를 두들겨 패버린 이른바 "하타 구타사건"이 대표적인 예이다.[* 사실 니시모토가 선수들에게 초구를 치지 말라고 지시할 당시, 하타는 대기 타석에 있었기 때문에 니시모토의 지시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며 하타 자신이 해명했고 처음엔 좀 분했지만 나중엔 니시모토 감독의 심정을 이해했다고 털어놓았다.][* 또한 하타의 동료인 [[나시다 마사타카]]가 "하타는 감독님이 지시할 때 대기 타석에 있었다" 라고 설명하자 니시모토는 속으로 '아차!' 싶었지만 하타에게 직접 사과하지는 않았고, 후일 긴테쓰가 오릭스와 합병될 무렵 언론사에서 마련한 하타와의 대담 시간 때 "때리고 나서 후회하긴 했지만 사과한다면 감독 입장이 무너질 것 같아 그냥 넘어갔다" 라고 술회하였다.] 앞서 언급한 대로 8번의 준우승 경력이 말해주듯 '''비운의 명장''' 이란 꼬리표가 붙어 있지만 이런 평가에 대해 니시모토 자신이 말하기를, >만약 내가 진짜로 비운이었다면 전장에서 이미 죽은 몸이었겠지. >그라운드로 다시 돌아온다던가 다이마이, 한큐, 킨테츠 세 팀에서 훌륭한 선수들을 만나서 >여덟 번이나 일본시리즈에 진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비운의 명장? 차라리 행운의 범장(평범한 장수) 이었다고 한다면 인정하겠다.''' 한편으로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미하라 오사무]], [[호시노 센이치]]와 함께 3명밖에 없는 3구단에서 우승한 감독이기도 하다. [[분류:일본의 야구 선수]][[분류:1920년 출생]][[분류:1950년 데뷔]][[분류:1955년 은퇴]][[분류:2011년 사망]][[분류:일본의 야구감독]][[분류:내야수]][[분류:좌투좌타]][[분류:와카야마시 출신 인물]][[분류:심부전으로 죽은 인물]][[분류:치바 롯데 마린즈/은퇴, 이적]][[분류:일본야구전당 헌액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